Kyuntae Ethan Kim
5 min readJan 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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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로 살다가 투자자로 살게된 이야기

나는 스물 세 살 때부터 서른 두 살때까지 약 10년간 개발자로 살았다. 개발자로 살 때는 종종 페이스북에 내 의견을 글로 표현하기도 하고, 그때 그때 떠오르는 내 생각을 포스팅하기도 했었다. 아직 짧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투자활동을 업으로 삼기 시작하면서는 내 생각을 남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예전에 비해 훨씬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졌다. 왜 그런가 곰곰이 고민을 해보니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분야에서 내가 틀렸다는 점을 만천하에 드러내는게 쉽지 않았던 탓이다. 기본적으로 ‘내가 틀렸다’는 일을 받아들이는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다만, 개발자로 살 때야 개발 분야가 아닌 이상 어차피 맞든 틀리든 나한테 큰 문제가 아니었고, 내 전문영역이 아니니 당연히 틀릴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쉬웠다. 그런데 투자를 전문적으로 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내가 관심을 두는 모든 분야들이 다 투자와 연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조심스러워져서 내 생각을 드러내는게 어느 순간부터인지 큰 부담이 되었다. 어찌보면 내 전문영역에서 틀리지 않고 잘하고 싶은 마음때문에 스스로 부담을 지운 꼴인데, 이 ‘투자’라는게 참 묘하다.

내가 투자한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회수하는 행위를 ‘승’, 내가 투자한 금액보다 낮은 금액으로 회수하거나 회수하지 못하는 행위를 ‘패’라고 정의한다면 투자 영역에서는 승률 50%가 넘어가면 그건 정말정말 투자를 잘한거다. 내가 속해있는 벤처캐피탈 업에서는 승률이 10%에도 못미치는 일이 다반사다. 다시 말해서 내 예상이 거의 틀렸을거라고 전제하고 시작해야된다. 거의 대부분 틀린 이야기를 하다가 어쩌다 하나를 엄청 ‘세게’ 맞혀서 높은 수익률을 기대해야하는게 벤처캐피탈이다. ‘투자’라는 업의 본질상 틀리는게 일상이고, 이를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더 올바른 판단을 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겠지만, 신이 아닌 이상에야 무조건 내 판단이 틀리는 상황을 필연적으로 많이 겪을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개발자로 10년을 살아온 내가 ‘투자'라는 활동에 적응하는 것이 (물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부단히 노력중이지만) 얼마나 곤욕스러웠을지 상상이 가는가? 개발자는 기본적으로 맞는 말을 해야한다. 내가 기능을 잘못 구현해서 버그가 있을지언정 ‘구현'의 레벨에서는 적어도 컴파일이 되고 프로그램이 굴러가야된다. 추상적인 레벨의 요구사항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코드 레벨로 내려와서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굴러갈지에 대해 세세한 로직을 짜고, 실체있는 코드뭉치로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렇다보니 코드리뷰를 받기 위해 내 코드를 다른 개발자에게 보여줄 때에는 내 코드에 100%에 가까운 확신이 있어야된다.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다른 개발자들과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다. 코드레벨에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누가 맞고 틀린지가 확실하고, 철저한 자기검증을 거쳐서 확신이 없으면 애초에 덤비질 않는다. 모두가 그런건 아니지만, 그만큼 훌륭한 개발자는 맞는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자기 확신의 레벨도 높다.

이렇게 10년을 입바른 말만 하고 살았어야만 했던 내가 본격적으로 투자활동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내 머릿속의 혼란이 얼마나 심했겠나. 개발자로 오래 살다보니 ‘이건 되고 이건 안돼' 라는걸 빠르게 머릿속에서 계산하는게 버릇이 되었고, 이게 내 스스로의 상상력을 갉아먹고 현실적인 한계부터 생각하게끔 만들었었다. (물론, 이건 내 개발실력이 그만큼 충분히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낸거라 생각한다. 날라다니는 개발자에겐 한계란 없다) 그리고 이런 현실적인 한계부터 생각하는 내 습성이 ‘투자’에서 때로는 허황되 보일수도 있는 틀린 말을 하고 다니는걸 더 껄끄럽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인건 요 몇 년간 정말 압축적으로 다양한 투자를 경험하면서 투자행위 자체에 대해 좀 더 친근해지고, 이제는 내가 틀린 말을 많이 하고 다니는데에 좀 부담을 덜 느끼게 된 것 같다. 물론 아직도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내 머릿속의 서로 다른 두 페르소나가 힘겹게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이 두 페르소나를 잘 활용하니 10년간 꽤 깊은 늪까지 발을 담궜던 개발 경험을 아주 요긴하게 투자에 써먹을 때도 종종 생긴다. 그리고 오늘도 개발하느라 골머리를 썩히는 개발자분들의 마음을 그래도 남들보다 조금은 더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 같아 참 감사하다.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복이니까 말이다.

투자라는 업에서 승률이 낮은게 일상이라는걸 이해하고 나서도 꽤 오랜 시간동안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게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틀리더라도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게 좀 편해진 것 같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블로그에 내 생각을 더 자주 남기고 틀린 이야기를 더 많이 해보려고 한다. 양에 대한 부담을 느끼면 또 쉽게 키보드를 두드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주 짧은 단상이나 일기형태의 이야기도 좀 더 자주 글로 남겨볼까 싶다. 원래 새해가 밝으면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타입의 사람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새해 1월에 이렇게 글을 올린다. 앞으로 내 개인 블로그에 틀린 이야기나 허황된 이야기가 다소 올라오더라도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정도로 봐주신다면 너무 감사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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